타고난 비인간이 꾸며낸 이야기들, 양효실 203

서인혜 작가의 박수근 레지던시 결과보고 전시 《방울물과 지느러미 발》은 단채널 영상, 평면 드로잉과 텍스트, 입체 설치물, 이렇게 세 파트로 구성되었다. 9분 가량의 영상 <1장 방울물 여인>은 구글과 유투브에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흑백 영화나 다큐의 이미지들, 그리고 그것을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연결하는 작가 자신이 직접 쓰고 낭독하는 텍스트로 이루어졌다. 종이에 그린 해부학적 드로잉과 세로로 적어나간 작가의 텍스트로 이루어진 <2장 지느러미 발>의 텍스트는 엄지발가락의 작은 뼈 세사모이드, 3억 5천만여년 전에 존재했던 수중 생물 아칸토스테가, 생전에 팥양갱을 좋아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독자에게는 모두 생경한 이야기들이다. 팥양갱은 작가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일부라는 점에서 우리는 세사모이드에 대한 정보 만큼이나 바깥의 이름-사물이다. 그리고 스티로폼·철망·시멘트와 같은 ‘저질’의 물질로 빚은 입체 조각 <공기의 딸>은 서인혜 작가의 이야기의 ‘내부’에 충분히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형상, ‘딸’에 대한 것이다.

<1장 방울물 여인>은 일차적으로는 작가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 그리고 작가의 모계쪽으로 유전되고 있는 무지외반증에 대한 고백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작가는 본 작업에 많은 영향을 준 아니 에르노의 “비인칭적 자서전” 형식의 소설 『세월』과 『한 여자』의 기법을 차용한 듯 ‘나’ 대신에 3인칭 ‘그녀’를 사용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간다. “그녀”, “그녀의 손녀”, “우리”와 같은 인칭대명사는 작가의 고백이나 체험이 사적인 맥락에 국한되지 않을 것임을 표식한다. 외할머니는 죽기 전에 마릴린 몬로가 처음 찍은 영화《나이아가라, 1953》에 나오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보고 싶다고 했고, 그녀의 12살 손녀인 작가가 여행에 동참했다. 객관적 사실에 관심이 없거나 ‘사실’의 지위를 따르지 않는 작가에게 이 사실은 지금도 남아 있는 사진이 겨우 증어할 뿐이다. 할머니는 이제 없고, 할머니와 똑같이 무지외반증을 앓고 있는 그녀의 손녀는 지금여기에서 할머니는 나이아가라에 돌아간 것이라고 상상한다. “암흑같이 깊은 물속에서 태어난 우리”, “어느 신화에 따르면 물거품에서 태어난 여신”인 우리는 지느러미에서 발가락으로 진화하는 데 실패한 수중생명체이기에, 죽으면 물로, 방울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 근육과 발이 온전하지 못한 그녀의 손녀”는 이제 독학으로 영상 편집을 배웠고 그러므로 물로 돌아간 할머니의 ‘사실’ 혹은 상상을 공표하려고 이 영상을 만들었다. 발로 진화하는 데 실패한, 불완전한 혼종적 비인간 동물로 살아가는 무지외반증의 여성들은 최초의 SF 영화 《메트로폴리스, 1927》에 나오는 중성적-과도기적 여성, 여주인공 마리아를 복제한 로봇, 혹은 “버츄얼 휴먼”과 동족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기억하는 영화 《나이아가라》로 시작한 영상은 갑자기 《메트로폴리스》로 장면전환한다.

역설적이게도 발레리나를꿈꿨던 작가의 “그녀의 손녀” 이야기는 여자의 발을 찍은 흑백 다큐 영상을 끌어들여 편집하게 만든다. 작가는 “살아있는 자와 사라진 자, 실존과 상상, 꿈과 역사를 연결한다”. 그리고 이런 연결은 모두 흑백 영상에서 갖고 온 이미지들, 밖에 나가서 지금 이곳의 사람들을 목격하고 접촉하고 거기에서 삶의 이미지, 거울을 갖고오는 이가 아닌, 골방/작업실에서 홀로 작업하는 장애를 앓는 여성 작가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지금의 “그녀의 손녀”에게 의지할 ‘사실’ 은 “모계의 통증”이다. “그녀의 딸과 아이였던 그녀의 손녀를 이어줬던 것은 바로 그녀이고, 그녀의 걸음, 그녀의 질병, 그녀의 몸짓, 그녀의 걷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닌, 할머니의 복제-로봇이고, 이러한 반복이, 이러한 통증으로서의 고통이 “태어난 세계와의 연결을, 그녀의 이미지를, 모든 장면들을 끊임없이 연결한다”. 미래를 향해 진화하고 미래에 현재를 저당잡히는 인간의 세계에서 이들 지느러미-발을 갖고 사는 비인간들은 과거를 뒤지고 과거로 되돌아가고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이 임무이다. 무지외반증이라는 장애, 서고 걷고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의 능력이 결여된 이 비인간은 그래서 “시력으로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당신에게 나는 그저 환상일 뿐이다. 그저 스크린에 투과되는 빛일 뿐이다”고 담담하게 쓸 수 있다. 결여, 장애, 고통의 감각, 가시성의 위치에서는 밀려난 이 안 보이는 비인간들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조합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건강과 젊음을 문화적으로 특권화하는”(제인 갤럽,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 사회에서 장애와 “후발 장애”로서의 노화는 직선적인 진보의 서사가 도달하는 미래와는 다른 시간, “재생산을 특권화하는, 비생식적 삶과 순간들을 저평가하는, 성적 생애 경로에 도전하는 퀴어 시간성”을발명한다. 끊임없이 사라진 문화 형식들, 이야기 방식들, 이번에는 외할머니로 등장하는 여성노인들의 특이성의 형식들을 발굴하고 기록하고 서술하는 서인혜 작가의 실천을 “직선적이지도, 이성애적이지도 않은 시간성, 질서 정연히 배치되지 않는 순간에 초점을 둔 시간성”과 연결해 재고하는 것의 유의미성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가장 급진적인 페미니즘은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이다. 한동안 정체성 페미니즘, 젊고 생식 능력을 갖춘 여성들이 주도한 페미니즘이 압도했고, 이제 거기서 이탈한, 배제된, 폐제된 페미니즘들 중 하나인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을 방법론으로 하는 새로운 글쓰기들이 계속 출판물로 등장하고 있다. 얼마전 “장애는 개성인가 질병인가”라는 문장을 만나고 한동안 충격에 빠졌던 것은 장애가 개성, 차이, 특이성일 수 있음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무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의 소원성취를 여신의 귀향이라는 관점에서 재서술할 수 있는 능력은 결국 온전히 인간으로 진화하는 데 실패한 그 많은 비인간들이 남긴 수많은 기록들, 세로로 쓰여졌거나 가설로 전해지거나 루머나 환상으로 분류되는 이야기들을 계속 찾아내고 그것들을 잇는 실천에 기반한다. 적응에 실패한 이 비인간들이 이제 묵시록적인 미래를 책임질 포스트휴먼의 형상으로 재전유된다는 것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를 참칭하고, 인간을 자처하는 비장애인들의 규범 안에서 살아야하는 소수자로서, 혹은예술가로서 서인혜는 천재 전통 혹은 생식적 은유를 따르는 창조나 모더니티의 정언명령인 새로움의 강박에서 자유로운 채 이미 존재하는 형식들, 전통이나 유물로 분류된, 이제는 사용가치가 없는 미적 형식들을 현재화한다. 고통의 감각, 혹은 감각이 현재를 과거와 잇는다. 혹은 현재는 과거, 이곳으로 계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의 시간성을 복기하기 위한 무대이다. 서인혜 작가의 영상과 텍스트 혹은 이미지들이 읽기 어렵다면, 그것은 인간들이 아니라 비인간들의 이야기, “부서진 음”이나 “소음”, 혹은 “돌 모래 파편이 등장하는 노래”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무대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노래, “시력으로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당신”은 듣기 어려운 노래를 위한 무대이다.

<2장 지느러미 발>에서 쓰여지고 그려지는 아칸토스테가는 물 속에서 발가락과 발을 갖고 있던 물고기이다. 땅 위에서 지느러미를 갖고 사는 “그녀의 손녀”의 거울 이미지 같은 것이다. 팥양갱을 좋아한 할머니는 어쩌면 엄지발가락의 두 개의 작은 뼈 세사모이드의 불완전함이나 무능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양갱으로 보충하고 싶었나보다”라고 “그녀의 손녀”인 작가는 쓴다. 할머니와 엄마와 나, “우리는 공기의 딸들입니다”로 끝나는 텍스트가 유전적 결함을 갖고 있는,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야 하는 자신에 대한 긍정임은 자명하다. 장애는 개성인게 분명하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예술가가 된 손녀 덕분에 자신도 모르는 비밀, 혹은 마침내 손녀가 밝혀내고 해명해준 비밀을 통해 더 오래되고 더 아득하고 더 충부한 이야기, 신화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실로서의 역사와 꾸며낸 것으로의 이야기(histoire)가 불어에서는 같다는 점에 착안한다면, 서인혜 작가의 꾸며낸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낭설이 아닐 수 있다. 인간들의 역사가 허무맹랑한 낭설일 수 있듯이. 그러므로 당신에게 당신이 원하는 얼굴은 돌려주지 않을 <공기의 딸>의 얼굴을 당신은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을 잃은 채, 당신을 잊은채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