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변신이야기, 윤원화 2025

변신 이야기
윤원화

《별비늘 호텔》(2025)은 서인혜가 양주시립창작스튜디오에 머물면서 우연히 알게 된 두 할머니의 이야기, 더 정확히 말해 그 이야기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요양원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늙은 어머니와 그를 가끔 찾아오는 늙은 딸이 있다. 작가는 이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요양원에서 지내는 여러 할머니들의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교외 지역의 규격화된 시설에서 눈에 띄지 않게 처리되는 생의 마지막 날들에 관해 생각한다. “지구에서 죽음은 요양소와 병원으로 가지런히 차곡차곡 사라졌어. 산 자들은 망자들의 이야기를 돌보지 않았지. 지구에는 더 이상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았어.”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전시와 동명의 영상 작품에서, 자기를 우주의 방랑자로 소개하는 이름 없는 화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별비늘 호텔에 투숙했고 이제 곧 떠날 예정이라는 이 외계 방문자가 허구화된 작가 자신임을 눈치 채기는 어렵지 않다. 언뜻 보면 그의 메시지는 시공을 초월하는 머나먼 곳에서 발송된 것 같지만, 실제로 그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은 모두 전시가 열리는 바로 그곳에서 작가가 보고 들은 것들이다. 캠핑장과 펜션, 놀이공원과 미술관, 공원묘지와 요양원이 혼재된 외진 산골 마을에서, 그는 불시착한 외계인처럼 이야기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대단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사회 구성원으로서 잘 보이지 않고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 노인들은 지난 몇 년간 서인혜의 작업에 꾸준히 등장해 왔다. 그는 큰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는 투로 말했다. 어딜 가나 할머니들이 있어서 눈길이 갔고,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작가는 가창창작스튜디오와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지역 주민들을 직접 면담하며 자료를 모았고, 그 경험은 《나무 껍질을 입는 몸》(2020) 이후 작업의 원재료가 되었다. 할머니들의 주름진 피부, 의복의 색채와 문양,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는 그들이 살아온 시간과 그 사회적, 문화적, 생물학적 조건을 각인한 일종의 레코드처럼 수집되어 회화, 조각, 영상을 포함하는 복합 매체 설치로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축적한 기억의 단편들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그들에게 어떤 형상과 이야기를 부여할 것인가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남았다. 작가는 아마추어 민족지학자처럼 나이 든 여성들을 재현하고 이해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면서도, 그 과정에서 다시 누락되는 것들, 잘 읽히지 않고 애초에 언어화되지 못하는
배경 잡음 같은 미세한 신호들에 거듭 이끌렸다. 그 잔여적 데이터는 유의미한 삶을 열망하는 개인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젊고 건강한 몸으로는 깨닫기 어려운 어떤 진실을 담은 것으로서 작가를 매혹했던 듯하다. 그러나 물질화된 기억의 파편들을 존재의 신비가 기록된 고대의 상형문자처럼 대할 때, 그의 시선은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지상을 떠나 어딘가 먼 곳으로 날아가버리곤 했다.


이 거리감은 말과 살, 필멸과 영원, 그리고 물론 자기와 타자의 불가해한 간격을 함축한다. 한편에는 개인으로서 자기 정체성과 역사를 구성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다수의 여성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들의 삶을 아무리 그럴싸한 이야기로 만들어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고 느끼는 또 한 명의
여성이 있다. 분명 작가는 할머니들에게 자기를 겹쳐 보았고, 그들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획득하고 싶어했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야기를 남긴대. 축축한 지구산 진짜 가죽.” 외계인을 자처하는 화자가 조금은 탐욕스럽게 소근거린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늙은 딸과 어머니의
대화는 들리지 않는다. 마치 카메라를 든 사람이 아주 멀리서 화면을 당겨 보는 것처럼, 또는 어떤 미지의 힘이 그들의 말을 엿듣는 것을 금지하는 것처럼. 물론 사운드를 끄기로 결정한 것은 작가다.

하지만 사운드를 켜도 그 인물들이 특별히 내밀한 말을 주고받는 것 같지는 않다. 반대편의 ‘객실’에 설치된 또 다른 영상 작품에서, 딸은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어머니가 그조차 따라 하지 못하고 간신히 ‘아멘, 아멘’ 하고 중얼거리는 모습에 애가 탄다. 기억이 흩어지고 말이 멈추고, 언젠가는 숨결조차 끊어질 육신에 합당한 이야기는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소중히 엮는 이야기들은 모두 한때의 꿈에 불과하지 않나. 서인혜의 작업의 근저에는 결국 그런 질문들이 도사리고 있다.
산 자는 죽음 너머를 볼 수 없기에, 일단 그 불투명한 심연을 의식하면 삶의 의미도 더 이상 자명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요양원의 노인들은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알록달록한 운동 기구를 써서 열심히 손발을 움직인다. 작가는 카메라 뒤에서 그들을 응시하면서, 유치원생 같은 그 해맑은 몸짓에 뭔가 의미가 있기를, 남은 날들이 전부가 아니고 죽음이 그들의 끝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관찰자의 열망이 별비늘 호텔이라는 허구적 장소를 만들어낸다. “그곳은 산 자들과 망자들이 팔짱을 끼고 나란히 누워 있었어.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이야기였고, 죽은 존재는 더욱 그랬지.” 현실과 중첩된 환상 속에서 외계 투숙객이 말한다. 화면 속에서 미사포를 두르고 고개를 돌려 잠시 카메라를 향하는 할머니의 나무 껍질 같은 얼굴은 모든 종류의 해석에 저항하는 듯 보인다. 하얗게 흐려진 눈이 무언가 지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감각과 기억이 뒤섞인 잡음 속에 조용히 잠겨 있을 뿐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환상 세계에서 온 이방인은 주름진 피부에 새겨진 삶의 기억과 죽음의 운명, 그리고 머리를 덮은 레이스 천에 수놓아진 영원의 약속을 보면서 미래를 예견한다. 죽음을 통과한 자는 나비가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듯이 가벼운 날개를 달고 우주를 유영하며 달의 표면에 반짝이는 기억의 비늘들을 흩뿌릴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바로 그 저승의 여행자 중 하나이며, 우리는 모두 끝없는 생사의 순환 속에서 흩어졌다가 다시 뭉쳐진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태어나고 늙고 소멸하며 그 과정을 지켜보고 돌보는 일의 괴로움은 그치지 않는다. 딸과 어머니는 서로를 향하는 동시에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역설적 운동 속에서 끝내 의미를 알 수 없는 생을 이어간다.

수천 년 전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입을 빌려 이와 유사한 순환적 세계관을 설파한 바 있다.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위대한 발명가인 자연은 끊임없이 다른 형상에서 새 형상을 만들어내오. 그대들은 내 말을 믿으시오! 온 세상에 소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단지 그것이 변하고 모습을 바꿀 뿐이오. 태어난다 함은 이전과는 다른 것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죽는다 함은 같은 것이기를 그만둔다는 것이오.” 그러나 이 오래된 서사시의 화자가 순수한 정신의 눈으로 우주의 진리를 꿰뚫어 본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서인혜는 갈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돌봄의 연쇄속에서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줄 어떤 날개옷 또는 수의 같은 물질기호적 그물망을 엮는다. 그는 살아 있음의 고통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벌거벗은 상태로 노출하기를 꺼린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든 간에, 만약 죽음이 거대한 공허일 뿐이라면 더더욱, 우리는 서로를 위해 형상을 빚고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떤 간절함이 있다. 그래서 중력에 속박된 몸은 주인 없는 보행기가 되고, 이끼가 자라는 작은 무덤이 되며, 불멸의 영혼과는 거리가 먼, “허물을 벗어 놓은 듯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한 기억들”은 신비한 우주 나비를 기르는 고치 또는 “허물 우주선”이 된다. 별비늘 호텔의 객실을 채운 회화와 조각 작품들은 그런 변신의 국면들을 도해하면서 모든 아픔과 번민을 벗어난 피안의 세계에 대한 소망을 전달한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과, 죽음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는 것은 엄밀히 별개의 문제다. 서인혜가 이 둘을 동전의 양면처럼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특히 자신이 태어난 모계 혈통의 관점에서 그것들이 거의 구별되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삶과 죽음을 여성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외할머니의 유품인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을 낱장으로 분해하고 색을 칠해서 읽을 수 없는 그림으로 변형한 초기작 〈버무려진 이야기〉(2017) 이후, 그의 작업은 단지 그 불투명한 색면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 넣으려는 시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여성의 사회적 조건보다도 그 생물학적 숙명에 좀 더 이끌리는 경향이 있었고, 멋진 이야기를 만들려는 야망은 번번히 삶의 무상함에 발목이 잡혔다. 《별비늘 호텔》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예술이 무용한 위안과 무력한 기도밖에 되지 못한다는 작가의 자괴감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그 솔직함은 손쉬운 냉소나 비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무능하다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그는 지상에서 행복을 찾는다거나 내세에서 구원받는다는 진부한 약속에 더는 의지할 수 없다면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현대적인 기대의 지평이 허물어지는 지금 우리 자신의 한계를 재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만연하는 죽음의 그림자에 잠식되지 않고 유한한 삶의 반짝임을 수집하는 우주의 방랑자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을까. 그의 다음 여정을 기대한다.